- 하루를 시작하면서-

 

잠에서 깨긴 많이 이른 시간.

창을 때리는 소리에 눈을 뜨고야 말았더니

잡아먹을 듯 덤벼드는 장대비를 보았다.

그냥 일어날까?

벽시계를 보니 아직 2시30분.

에라! 모르겠다. 다시 엎어지자.

그래서 겨우 잠들었다 두 번째로 일어 나

하나로마트에서 사온 복숭아 한 개.

토스트에 얹힌 치즈로 아침을 때우고 집을 나서니

그렇게 요란 떨던 비가 멎었다.

 

조용하다 출근하려니

굵은 비 들이 붓던 날도 있었는데

오늘은 출근하려니 세상 잠잠하네.

삶의 타이밍을 잘 모르겠어.

빽빽하게 계획하고 검증하고 또 돌아보았던

어떤 것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게 뭐 될까?

기대보다는 의구심이 더 컸던 어느 것은

뜻밖에 좋은 변수를 만나 갈채를 받았다.

 

진짜 잘 모르겠네!

지나치게 잘 하려는 생각을 버릴테야.

빠르게 이루려는 마음도 설득하여 보아야 해.

오늘은 그저 하루에 충실하기로.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말기로.

할 것에 충실하였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결국은 내가 기쁘게 살게 될 것이라는.

 

▶ 우산을 펴 보지고 못하고 출근했다.

퇴근할 때라도 우산은 펴 보아야 할 텐데

그래야 우산도 자기 밥벌이는 했다고 당당할 테니.

2023년 7월 10일 월요일 고 호순

보름 전 이었을 겁니다. 퇴근하여 집으로 들어가는 관리실 앞에 빈 페트병. 언 녀석이 ㅎㅎ 쓰레기를 화단에 버렸나? 참 개념들이 없어! 투덜거리며 화단 앞으로 다가서니 글씨가 보입니다. 채송화를 살려 달라는 간절한 청원.

점심을 시답지 않게 먹어서 저녁이라도 알차게 먹어야지! 굳은 결의를 하며 얼른 집에 올라가려다 그래도 어쩐?하고 몸을 굽혀 화단에 눈을 바짝 갖다 대어봅니다. 채송화? 이 식물들은 채송화가 아닌데? 아주 유사하게 생기긴 했는데 분명 채송화는 아니었습니다. 에잇~이름이나 잘 알고 하던지 투덜투덜...서푼도 안 되는 지식으로 글쓴이를 판단하였습니다.

뭉크의 "절규"..... 일그러진 얼굴을 부여잡고 놀람과 좌절을 표출한 그림처럼 채송화를 살려달라는 절규를 느낍니다. 그 절규는 좌절이 아니라 어쩌면 용기입니다. 당신과 나의 절규는 드러내놓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거나 대면하여 풀고자하는 의지도 없는 회피가 아닙니까? 용기 있는 절규. “채송화를 살려주세요.” 화단 앞에서 잠시 서성이던 나는 배고픔을 감지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12층 버튼을 급하게 누르고......그 날 이후 그렇게 하염없이 또 보름이 지나고.

관리실 앞을 지나가다 제법 자란 식물 사이로 언뜻 보이는 작은 꽃 하나. 빠알간 꽃 한 송이, 저건? 그러네! 저건? 맞습니다. 대략 보름 전 즈음 투명 페트병에 검정매직으로 쓴 글씨" 채송화를 살려 주세요" 그 간절한 애걸(哀乞)에 채송화가 어디 있냐? 잘 알고나 청원을 하지 코웃음 치며 지나갔던 그? 이번에는 다른 마음으로 화단에 몸을 굽혀 코와 눈을 늘어트립니다.

채송화가 맞네! 채송화가 있었어! 우월한 식물의 장벽에 막혀 겨우 숨만 쉬고 있었던 가녀린 채송화. 아빠와 함께 했던 추억을 그리다가 불현듯 떠오른 기억 속에 채송화를 생각하다 나지막하게 부르던 노래 속의 낮은 꽃.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채송화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꽃 , 숨어 있던 채송화, 페트병에 글로 애타게 부르짖던 그 사람은 감춰있던 채송화를 어찌 알았을까요? 아직 덜된 어느 봄 날 씨앗을 뿌린 걸까요? 한 송이가 피어난 것을 보면 씨앗에 의한 발아는 아닐. 한동안 채송화 앞에서 떠나질 못했습니다. 내 시각으로 섣불리 판단했던 보름 전 생각.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그 고질적 뿌리는 내 삶 속으로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렸는지....

제법 숲을 이룬 화단 식물 사이를 헤치며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 채송화를 살려달라고 청원하는 글을 남겼던 맑은 페트병. 나의 오만으로 비웃으며 돌을 던지게 했던 그 페트병이 아직도 있을까? 미안함을 전달하고 싶었던 겁니다. 비록 글쓴이는 만나 보기 힘들겠지만 그 분이 남긴 페트병이라도 찾아서 굽죄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찾아내고야 말았던 페트병. 그리고 그 사이 페트병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글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채송화. 아껴 주시면......그러자 페트병 뒤편에도 또 다른 글이 있다는 것을......

그랬습니다. 투명한 페트병 주위로 글이 있었습니다. 간절한 당부와 그에 걸 맞는 감사와 보응의 글 “ 저는 채송화입니다. 아껴주시면 예쁜 꽃으로 보답할께요!” 보답한다! 말은 숱하고 그런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은 귀하고 드문. 누구일까요? 이 고마움을 페트병에 붙인 사람은

어린 아이일까요? 세상 이치를 좀 안다고 자부하는 어른일까요?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나이로 구분하는 걸까요? 아님 보이는 외형? 마음 씀씀이? 채우고 있는 지력(知力)?

솔직히 낫살이나 먹어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 하나. 품어주는 사람. 무슨 말을 하여도 받아 주는 사람. 나는 그런 분을 뒤따르고 싶습니다. 비록 어린아이 일지라도 본받을 이로 여기며.........

해야 할 숙제 같은 것들이 많아서 조금 이르게 도착한 회사. 그런데 시계 엔틱하죠? 아직도 오리엔트 시계가? 네! 당신이 말하는 그 오리엔트 맞습니다. 잠시 후 거래처 대표께서 지나가다 방문 하여 싸구려 봉다리 커피 한 잔씩 박치기하려 할 그 때 , 한통의 전화가 긴급하게. 벨소리는 이렇게 "헬렐렐레~헬렐렐레~헬렐렐레~ ㅎㅎㅎ

 

한강에서 살짝 사귄 분이(여자 아녀요~ㅎㅎ) 고기를 가져 갈 수 있냐고 전화를 주신 겁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주었다는 것은 밤을 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은 고기와 상관이 없으니....나도 한 때는 밤을 새곤 했는데 이제는 밤을 재웁니다. 키득키득!

예기치 못했던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나의 친구 "한강"으로 고기 앵벌이 들어가십니다. 내 주위에 아시는 분들이 민물고기를 그렇게들 좋아라~하셔서 주는 기쁨으로 앵벌이 합니다. 우리가 제공하는 것들은 신선도 100%. 그리고 유통단계 없이 산지 직송체계 되시겠습니다.

모래사장에 콘크리트를 덮고, 강물의 범람을 막아보려 턱을 세우고, 다시 그 둔덕 위로 끈적이는 아스팔트를 펴서, 사람 편의에 맞춰 굳히기 작전에 들어간 지 벌써 오래. 이후로 낮이고 밤이고 거기다 새벽에도 씽씽~자전거, 아~씽씽 비키세요~자전거 지나갑니다.

이른 아침이어서 중턱 콘크리트 통행로에는 사람이 붙질 않았습니다. 미루나무 옆길엔 씽씽~자전거가 달려도, 중간 길엔 저녁까지 휑하게 뚫려 있을 겁니다. 이렇게 길이 좋은데 나는 아직도 떠날 챤스만 셈하고 있네요! 이 길 따라 한 없이 걷다보면 한강 하구겠죠? 그럼 삶은?

 

황석영 장편소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엔 이런 글이 있습니다.▶여름이면 연변의 짙푸른 백양나무 그늘이 드리워지기도 하는 저 버스의 창가 자리에 턱을 쳐들고 오만하게 버티고 앉아서, 타관으로 떠날 수 있을 날은 언제쯤일까. 접근조차 손쉽지 않은 버스를 쳐다보면서 아우와 나는 버스가 떠날 때까지 정류소를 떠나지 않았다. 멀고 먼 타관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은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오래된 노트 한 권을 뒤적거리다 시답지 않은 글 하나를 찾았습니다. 휘갈긴 글. 글씨체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같네요.. 1989년도에 시외버스를 타고 평택 서정리라는 동네로 무작정 떠난 일이 있었네요. 하룻길 여정. 기억으론 평택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물길. 서정리 다리에 걸쳐 앉아 노트에 긁적였을. 돌아보면 긴 듯 하여도 당신이나 나도 하루 밤 잤는데 황혼.

한강은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어린 날, 언제, 어느 때 찾아가도 한강은 나를 반겨 주었습니다. 한강 품이 그리울 때면 옥수동 산비탈에서 기어 내려와 단국大와 부자동네 유엔 빌리지 샛길로 제3한강교를 건너 압구정동 배 밭 뚝방 아래 강변 모래사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엄지손톱 크기의 노란 조개는 물기 머금은 모래 속으로 감쪽같이 은둔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나를 따돌리지는 못했고 칠성장어. 징거미. 참게. 어느 날은 팔뚝만 메기도 내주었던 한강. 그 모래사장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날엔 어김없이 별들이 내 얼굴로 와르르르 쏟아 내렸고 그렇게 강가에 누웠다 한 밤중 집으로 돌아갔던 날엔 어김없이 내 종아리를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아들이 걱정되었던 어머님의 회초리.

그렇게 절친으로 보내다 세상이라는 또 다른 친구를 만나 한 마디 이별의 말도 없이 어쩌다 한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7월의 장대비가 한강물을 불려도 나는 더 이상 한강에 있지 않았습니다. 압구정동 김씨 아저씨네 과수원에 노란 배가 주렁주렁 달려도 철조망을 넘지 않았습니다. 거친 바람이 남산 소나무를 흔들 때도 나는 더 이상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바람이 났던 거죠! 바람이 나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주위의 충고도 들리지 않는 것.

그리고 알랑거리는 세상에 눈이 멀어 짝짜꿍하며 살다가 어느 해 8월 한강의 절규를 듣게 된 것입니다. 유독 더웠던 그 해 제3한강교를 지나다 한강을 보게 되었고 핸들을 잡고 있던 내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세상에 들러붙어 던져주는 부스러기나 얻어먹으며 뭐 하는 거냐고?“ 머리를 휘두르다 핸들을 놓칠 뻔 하고서야 정신이 돌아 왔습니다.

그 날 저녁 잠실 토끼 굴 아래로 차를 몰아 한강 가장 가까운 곳에 세우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그 아침, 서울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지며 콘크리트 도회지에서 삥 뜯어 먹고 살던 오랜 고착화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차 문을 밀고 나가서 본 한강은 순수할 때 보았던 그 잔물결이 이른 볕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편의점 같았던 세상을 조금 멀리하고 다시 한강으로 들어갔던 날. 한강은 여전히 나의 친구로 기다리고 있었음을.

그는 오늘도 저 비밀의 통로를 지나면 낚싯대 받쳐 놓고 앉아 언제 미끼를 물고 늘어질 줄 모르는 물고기를 기다리며 빛나는 눈으로 앉아 있을 겁니다. 기다린다는 거. 곤욕스런 과정이지만 그 끝의 맛을 알기에 밤을 보낼 수 있는 겁니다. 가슴이 콩당 거리기도 합니다. "미친" 맞습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에 다 미쳐있죠!. 멀쩡한 척 하지만.

그가 저기 있습니다. 뭐라고 했어요?! 저기 있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밤을 새하얗게 날려 버리고도 낯 찡그림 하나 없이 씨익~웃습니다. 나이를 몇 개 더 먹다보니 친구가 무엇인지 조금 더 알아 가고, 좋은 친구를 구하는 것보다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 갑니다. 좋은 친구는 자신의 유익보다 상대를 더 위한다는 것도.

좋은 친구....,자신은 언제나 조연이고 상대가 늘 주연이 되도록.. 이런 말 들어 보셨는지요?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좋은 친구라면, 훌륭한 리더라면 같이 한 동료에게 우선적으로 가장 맛난 것을 앞으로 밀어 주고 자기는 마지막으로 먹는다는 말입니다. 굳이 먹는 다는 것으로 표현을 했지만 무슨 뜻인지 아시죠? 모르시면 우리 더불어 한강으로 가서 편의점에서 뽀글이 라면도 먹어 보고, 행복한 사람들의 깔깔대는 소리와 빛나는 얼굴들을 보기로.

우리는 내가 주연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함몰되어 삽니다. 자녀들 교육도 그렇게 시킵니다. 옆 집 아들 창수보다 내 자식 등수가 떨어지면 지구가 파탄 나는 줄 알고 지금 다니는 학원이 못마땅하여 여기저기 검색하고 학원을 갈아 태웁니다. 예의? 그 딴 거 어디다 써먹으려고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1등이어야 합니다. 케케묵은 예절? 그런 건 종말처리장에나 버리라지. 그리고 결국 당신도 자식에게 배신당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렇게 키웠잖아요! 내가. 당신이.

한강에서 밤을 보내며 한강이 선물로 내어준 조과물을 보여주는 조우(釣友). 조우(釣友)라는 말도 가슴에 안기지만 좀 더 격조를 높여 표현하면 조사(釣士). 낚시하는 선비. 그는 지금 우리에게 땀의 선물. 물고기를 내어주고 있습니다. 가물치. 메기. 그리고 민물의 황제 쏘가리입니다. 누구 줄까? 벌써 행복합니다. 줄 수 있다는 거. 이 물고기를 받으면 좋아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 맛나게 요리하여 친구들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런데 이거 산삼 아니죠? 이파리가 좀 닮은 듯 하여 말입니다. 어설프게 알면 사람 잡습니다. 그런데 진짜 말입니다. 이거 산삼 아닐까요? 이거 산삼이면 대박. 한강 모처에 수두룩하게 있으니까요! 맞으면 당신에게 한 뿌리 드리겠습니다. 캬흐~넓은 마음. 아시죠? 우리 마음이 얼마나 넓은지 군대 귀신이 들어가고도 남는 면적이라니까요!

아침부터 물고기 앵벌이하고 뒤돌아 사무실로 돌아가는 한강 난간에 하얀 술병 하나. 아마 알코올 도수 확 낮춰서 여성 고객을 쓴물의 세계로 더 많이 영입시키려는 수완이 옅 보입니다. 하얀 술병만 보아도 좋게 여기는 감정이 불 일듯 일어나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저렇게 놓아두고 가면 어쩐다지? 물 들어오면 쓸려나가 떠돌아다니다 결국 파편으로 남아 날 선 흉기가 될 텐데 말입니다.“ 알게 뭐에욧? 내가 1등이면 되는 거지”

자꾸 만져 보고 ,거듭 해야 숙달되는 것이

변함없는 달인의 지름길.

컴퓨터를 배울 때 그랬고

자전거를 배울 때도 낚시를 익힐 때도 그러했다.

단박에 되는 것들은 또한 한 번에 잃어버리기도 했다.

어찌하다

계란 삶는 기계가 있다는 것을 듣고

부담 없는 가격을 확인 후 구매하여

이렇게 저렇게 달걀을 삶아 대다가

드디어 최적의 타이밍을 찾은 거다.

 

보라~이 완벽한 반숙의 고고한 자태를.

그림에서 사라진 반쪽의 계란은

지금 내 입 안에서 놀리고 있는 중.

퍽퍽함을 온전하게 물리친 이 부드러움의 극치.

그동안 알게 모르게

삶은 계란에 관해

관대함을 보여주지 못했던 나 이었지만

오늘 그에 관해 참회 수준의 반성까지 한다.

 

윤기 좔좔 흐르는 노른자.

소금이 없어도

거침없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반숙의 승리.

그 자리에서 두 개를 해치웠다.

맛보지 않은 자여~

반숙에 관하여 절대 논하지 말길.

반숙의 위대함을 본 이후

인생에 관하여 다른 생각을 해본다.

반숙은 달걀 내부를

살짝 덜 익힌 상태가 아니던가!

이론은 그러하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도

정상이라 말하는 인생에서

약간 덜 익은 상태 같은

부족함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겠다.

물론 이런 부류에

나 역시 포함이 되겠고 말이지.

우리가 세운 기준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이런 누구에게서는

오히려 더 기갈난 맛이 있지는 않을까?

그냥 내 생각이니 그러려니 하고 들어 주길.

불현듯 감사가 가슴을 데핀다.

-어쩌다 깬 잠-

 

어쩌다 낯선 샐녘에 일어나니

아직 덜 밝은 창밖으로 제법 쏠쏠한 비가 내린다.

여간해선 새벽에 일어난 적이 없는데 희한한 일이지.

묵직한 빗소리에 깬 것일까?

배터지게 밀어 넣은 저녁 식사 후

에라! 모르겠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탓일까?

식도염도 심하면서 어쩌려고.

 

끈적이는 몸을 헹구고 ㅎㅎㅎ

습관대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튼다.

부지런한 아침뉴스 앵커

장맛비 제주도로 올라온단다.

머잖아 대한민국은 장마 통에 들어가겠네.

똑같은 페이스로 흘러가는 한해살이

봄 오면 들판으로 여울로 쏘다니다

적우(積雨)에 잠시 숨 죽여 은둔생활 끝나면

사서 고생인 줄 알면서도

여름휴가는 필(必) ,꼭, 반드시 가야 한다지.

그리고 곧 추석 연휴 어찌어찌 보내고

띄엄띄엄 고추잠자리 보다가 이내 닥친 겨울

다시 오겠지. 무작정 기다리는 다시 봄(春)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내 년에도 내가 반드시 봄의 초청장을 받을까?

모르는 일인데 막연한 확신은 좀 우습지.

그러니

그저 오늘 하루 할 수 있는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해.

 

소파에 앉아 재밋대가리 일도 없는 것들 끼적대다

얄팍해진 빗소리에 잽싸게 출근 준비한다.

오밤중 내린 비로

회사 지하 창고에 물은 새지 않았겠지?

이제 물 푸는 것도 지겹다.

 

2023년 6월 21일 수요일 이른 아침.

 

▶ 비를 피하고 살지는 않았다.

외려 비가 오면 달려들어 비 중심으로 들어가

그 폭우에 몸을 맡기고 히죽이며 살았다.

그리고 나이를 잡수시고ㅎ

시답지 않게 예절이라는 허울로

언제부턴가 체면치레에 신경 쓰고 산다.

언제까지 이 가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때가 그립다.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철부지의 날들.

올 장마에 큰 비 내리면 슬그머니 집을 나서

그 들판에서 고즈넉이 서 있어 볼 테다.

갈아입을 옷 하나는 챙겨서 말이지.

내 인생의 과제물 들고 해갈을 꿈꾸며.

제주도에서 택배가 왔다.

이제는 택배가 너무 흔한 일상이어서

이것을 주문하지 않는 나로서는 별 관심도 없다.

아침에 출근 할 때면

아파트 집집마다 택배 박스.

저녁에 퇴근하여 집에 들어 갈 때도

집집마다 택배박스.

이러니 전통시장이 버텨낼 재간이 있을까 의문.

그 택배의 물동량은 C 회사가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중이고.

 

아침에 온 택배 박스를 여니 옥수수이다.

제주도에서 누가 보내었을까?

거래처에서 특별한 옥수수라며 보내온 것을 확인하고

바로 쪄 내어서

쫄깃한 식감을 기대하며 와락 베어 무니

???이게 무슨 맛?

옥수수가 덜 여물어서 쭈글텅.

아니 무슨 옥수수가 이래?

너무 익지 않은 옥수수를 보내었네!

그래도 버리기는 아까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해치우고

남은 생 옥수수는 어찌할까? 생각해도 해법이 없다.

찐 옥수수가 이리 맛이 없는데 어쩔?

시간이 좀 지났고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옥수수 이야기를 했더니

그게 바로 생으로 먹는 옥수수라 일러 준다.

뭣? 날 것으로 먹는 옥수수가 있단 말이야?

사람이 말이지 날로 먹으면 되겠어? 사기꾼도 아니고

훗훗훗

오늘은 남은 옥수수, 날로 먹어보아야 하겠다.

과연 맛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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