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이성을 이기던 날에-

 

컴퓨터를 끌어안고 있다가

거듬거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박차고 나가

시장 앞 그 떠들썩한 마트로 간다.

밖은 지금 장대비 작열.

근데 이 상황에 어찌하여 마트를?

뜬금없이 우윳빛처럼 뽀얗고

순한 비누로 머리를 감고 싶어진 것.

베란다 선반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경유로 들어온 비누 선물 셋트가 꽤 있지만

정작 내가 찾는 뽀얀 비누는 없었기에.

아내가 알면 이 얼마나

어이없는 짓을 벌이는 것인가?

그렇다고 과소비라고 말하진 말길.

꼴랑 세숫비누 하나이니......

 

이제는 이따금

감정이 이성을 이기는 것을 보고 싶은 거다.

오랜 시간, 이성이 나를 얼마나 옥죄고 지배했는가?

이성에게 지고 살았던 시간 속에

돌아 본 뒤안길, 후회도 있었으니 말이다.

 

▶야!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감정에 사로잡히면 그냥 훅~가는 거야“

 

학습은 언제나 이성적인 것이고

정답도 항상 이성적인 것에서 나왔다.

진로를 상담할 때도 나는 덜떨어진 것을 희망했었나보다.

▶네가 원하는 그 길은 먹고 살기 힘들 거야!

어쩔 건데?

네가 좋아하는 것은 알겠으나 도대체 뭘 먹고 살 건데?

시간 금방 간다!

고생 사서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 해!

 

이성은 차가웠다.

언젠가 뱀을 잡아 목에 걸었을 때

그 서늘한 체온처럼 이성은 냉철했다.

그렇게 이성을 스승으로 두고 살아온 탓에

남들만큼은 살게 된 것, 그건 인정.

하지만 누르고 살았던 뜨거운 가슴은

미련으로 응고가 되고 말았으니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

 

컴퓨터 앞에서 되지도 않은 혼잣말을 하다가

뽀얀 비누로 머리를 감던 사춘기 시절이 생각났다.

나도 그 비누로 머리를 감았고

내 친구 창수도 그 비누로 머리를 감고 쏘다녔다.

하얀 비누로 머리를 감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어른들은 꼭 이렇게 말했고

그럼 나는 꼭 이렇게 답했다.

아자쒸이~대가리에 피 마르면 죽어요...)

엄마를 속이고 여학생을 만나러 나간다.

신당동 건너 문화서적 골목

순백한 비누로 감아서 그럴까?

머리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가슴은 뛰고 얼굴은 포도주 색

장충중학교 3학년 중삐리가 뭘 안다고

머릿님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히죽거리며 78번 버스에 오른다.

창밖을 본다.

억수같은 비가 온다.

방바닥에 달라붙어 있어라~

집을 나서면 빗물에 너덜거리는 몸이 될 거야 이성의 귓속말.

음음음음......

에라 ~모르겠다.

하얀 비누를 사러가야지.

사방에서 물난리가 났다는 뉴스를 뒤로하고

집을 뛰어나가 그 마트로 달려간다.

하얀 비누로 머리를 감아야지.

그러면 머리에서 좋은 냄새가 날거야~

 

 

2023년 7월 극한호우 내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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